내 원고를 망치지 않고, 팔리는 책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 리퍼블릭 편집부

- 2일 전
- 3분 분량

내 원고를 지키면서 팔리는 책을 만들 수 있을까요?
-예비 저자와 출판기획자가 나눈 반기획출판 이야기
등장인물
혜원 스님
18년째 명상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유가족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개발해 책으로 펴내려 한다.
오 대표
저자의 전문성을 살리면서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만드는 리퍼블릭미디어 대표 출판기획자.
비 내리는 오후, 출판사 상담실.
혜원 스님이 두툼한 원고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혜원 스님
사별 유가족을 위한 명상상담 프로그램을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일곱 단계로 구성된 프로그램인데, 120명 넘게 참여했어요. 죄책감과 우울에 시달리던 분들이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오 대표
현장 경험과 프로그램의 성과가 분명하네요. 다만 현재 원고는 일반 독자를 위한 단행본보다는 상담 프로그램 워크북에 가깝습니다.
혜원 스님
다른 출판사에서도 에세이처럼 바꿔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쉽게 풀다 보면 제가 만든 프로그램의 핵심이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오 대표
반기획출판은 전문성을 없애거나 내용을 가볍게 만드는 작업이 아닙니다. 독자가 책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만드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혜원 스님
길을 만든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오 대표
지금 원고는 프로그램을 이미 아는 사람에게는 유용합니다. 하지만 처음 책을 펼친 독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불교를 잘 알아야 읽을 수 있나?”
“상담 전문가를 위한 교재인가?”
“내 슬픔과 이 이론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책이 독자보다 먼저 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이론 앞에 상담 장면을 넣고, 각 단계가 왜 필요한지 설명하고, 참여자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성해야 합니다.
혜원 스님
내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는 순서를 바꾸는 거군요.
오 대표
맞습니다. 전문성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을 토대로 독자를 위한 가이드를 만들어주는 겁니다.
혜원 스님
그러면 이 책은 서점에서 어디에 놓이게 됩니까?
오 대표
그것부터 정해야 합니다. 불교의 연기법과 죽음에 관한 가르침이 중심이라면 불교 심리상담 분야로 가야 합니다. 종교색을 줄이고 일반 심리치유 분야로 가려면 불교 개념을 대중의 언어로 더 많이 풀어야 하고요.
혜원 스님
불교적 뿌리는 지키고 싶습니다. 다만 불자가 아닌 사람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 대표
그렇다면 정체성은 지키되 제목, 부제, 목차와 사례를 통해 문턱을 낮추는 방향이 좋겠습니다.
혜원 스님
그런데 반기획출판은 일반 기획출판이나 자비출판과 무엇이 다른가요?
오 대표
기획출판은 출판사가 시장성을 판단해 제작비를 부담하는 방식입니다. 자비출판은 저자가 비용을 내고 원하는 형태의 책을 제작하는 방식이고요.
반기획출판은 그 중간입니다. 저자가 제작비 일부를 부담하지만 출판사도 기획과 판매에 책임을 집니다. 저자가 돈을 냈다고 해서 원고를 그대로 인쇄하지 않고, 독자에게 판매할 수 있는 책이 되도록 함께 수정합니다.
혜원 스님
출판사도 책이 팔려야 이익이 생기는 구조군요.
오 대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목과 표지, 정가, 목차를 저자의 취향만으로 정하지 않습니다. 저자와 출판사가 함께 책임지는 방식입니다.
혜원 스님
비용에는 무엇이 포함됩니까?
오 대표
출판기획, 원고 편집, 교정·교열, 표지와 내지 디자인, 종이책과 전자책 제작, 서점 유통, 보도자료와 기본적인 온라인 홍보가 포함됩니다. 추가 인쇄나 별도 광고는 협의가 필요하고요.
혜원 스님
책이 나온 뒤에도 홍보를 계속합니까?
오 대표
제작은 두세 달이면 끝나지만 판매와 유통은 그 뒤부터 시작됩니다. 종이책을 먼저 출간하고, 전자책 입점과 온라인 콘텐츠를 순차적으로 연결합니다. 스님처럼 불교신문이나 불교방송과 인연이 있다면 그 네트워크도 활용해야 합니다.
혜원 스님
책이 나오면 절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고 법공양용으로 판매할 수도 있습니다.
오 대표
그렇다면 초기 독자 기반이 있는 셈입니다. 다만 저자가 인쇄비를 부담해 책을 가져가더라도 판매할 때는 도서정가제를 지켜야 합니다.
혜원 스님
저작권은 어떻게 됩니까? 이 프로그램은 제가 오랫동안 연구해 직접 만든 것입니다.
오 대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습니다. 출판사가 갖는 것은 계약 기간 동안 책을 제작하고 유통할 수 있는 출판권입니다. 계약이 끝나고 재계약하지 않으면 다른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낼 수도 있습니다.
혜원 스님
제목은 유지하고 싶습니다. 죽음이 본래 없다는 의미인데, 독자에게 너무 어렵게 느껴질까요?
오 대표
제목을 반드시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부제로 의미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제목 후보와 표지 시안을 함께 놓고 최종적으로 판단하면 됩니다.
혜원 스님이 메모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든다.
혜원 스님
이제 반기획출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저자가 돈을 내고 책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군요.
오 대표
저자는 전문성과 경험을 내놓고, 출판사는 기획과 편집, 유통의 전문성을 보탭니다.
혜원 스님
비용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함께 나누는 출판이네요.
오 대표
맞습니다. 원고를 지키면서도 독자에게 닿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반기획출판의 역할입니다.
반기획출판은 모든 저자에게 맞는 방식은 아니다. 원고를 전혀 수정하고 싶지 않다면 자비출판이 적합할 수 있고
, 출판사가 모든 비용을 부담할 만큼 시장성이 높다면 기획출판에 도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적인 콘텐츠와 독자 기반은 있으면서,
이를 대중적인 책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필요한 저자라면 반기획출판이 현실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좋은 원고가 저절로 좋은 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경험과 출판사의 기획이 만날 때, 원고는 비로소 독자에게 닿을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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