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집 제작을 의뢰하기 전에 먼저 정해야 할 것들


사례집 제작을 의뢰하기 전에 먼저 정해야 할 것들
리퍼블릭미디어 대표작가
사례집 제작을 문의한 담당자와 통화했다. 계획은 80쪽, 600부였다. 총 20건의 사례를 담되 5건은 직접 만나 취재하고, 나머지 15건은 서면 인터뷰로 진행하려는 구상이었다. 10월 초에 상담을 시작해 11월 13일까지 인쇄를 마쳐야 했고, 인터뷰 대상자 섭외는 아직 진행 전이었다.
이런 의뢰를 받으면 나는 먼저 일정을 들여다본다. 언제까지 원고를 써야 하는지에 앞서, 언제부터 사람을 만날 수 있는지를 확인한다. 사례집은 취재할 대상과 자료가 확보되어야 비로소 제작 일정도 구체적으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상담에서도 담당자에게 섭외 진행 상황과 대면 취재 장소를 먼저 물었다.
제작을 처음 맡은 담당자라면 80쪽이라는 분량이 비교적 가볍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책이 얇다고 제작 과정까지 짧아지는 것은 아니다. 20명의 이야기를 실으려면 각각의 연락과 일정 조율이 필요하다. 질문을 보내고, 답변을 받고, 부족한 대목을 확인한 뒤 글로 정리하는 과정도 거쳐야 한다. 한 사람에게 배정되는 지면이 줄어들더라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확보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남는다.
오히려 짧은 지면에 사례를 담을 때는 무엇을 중심에 놓을지 더 분명해야 한다. 80쪽에 20건을 싣는다면 단순 계산으로 사례당 4쪽이지만, 실제로는 목차와 발간사 등 다른 구성에 들어갈 지면도 고려해야 한다. 각 사례의 배경과 과정, 성과를 어느 정도까지 보여줄 것인지 미리 정하지 않으면, 취재를 마친 뒤에야 원고를 크게 줄이거나 다시 구성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사례집을 준비하는 담당자에게 섭외와 함께 책의 성격을 정리해 달라고 권한다. 누구에게 보여줄 책인지, 사례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각 사례에서 꼭 확인해야 할 내용은 무엇인지를 먼저 적어보면 좋다. 이 기준이 있어야 질문도 구체적으로 만들 수 있고, 제한된 지면 안에서 무엇을 살릴지도 판단할 수 있다.
이번 의뢰에서는 10월 7일까지 섭외를 완료할 예정이라고 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확인할 필요가 있다. 섭외 완료가 참여 의사를 확인하는 단계인지, 실제 인터뷰 날짜와 서면 답변 제출일까지 정하는 단계인지에 따라 이후 일정이 달라진다. 참여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더라도 만날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면 취재 일정은 여전히 유동적이다. 서면 인터뷰도 답변을 언제 받을 수 있는지까지 정해두어야 집필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서면 인터뷰는 대면보다 수월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동과 현장 일정 조율이 줄어드는 것은 맞지만, 질문지를 보냈다고 곧바로 쓸 수 있는 원고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답변이 늦어질 수도 있고, 핵심 내용을 짧게 적어 보내 추가 확인이 필요할 수도 있다. 서면으로 진행할 15건에 대해서도 회신 기한과 보완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기간을 함께 생각해두기를 권한다.
대면 취재는 장소도 중요하다. 같은 5건이라도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지, 취재와 촬영을 한 번에 진행할 수 있는지에 따라 필요한 시간이 달라진다. 상담에서 취재 장소를 물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직 장소가 확정되지 않았다면 예상 지역이라도 공유해주는 편이 좋다. 그래야 제작사가 이동을 포함한 현실적인 일정을 검토할 수 있다.
납품일의 의미도 처음부터 맞춰두어야 한다. 11월 13일까지 완료한다는 말이 최종 파일을 전달한다는 뜻인지, 인쇄된 책을 받아야 한다는 뜻인지는 큰 차이가 있다. 인쇄까지 끝내야 한다면 그 전에 원고와 디자인을 확정해야 한다. 담당자의 검토와 수정 반영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책을 받아야 할 날짜에서 거꾸로 일정을 짚어보면, 취재와 답변 회신을 언제까지 마쳐야 하는지도 한층 분명해진다.
예산 역시 페이지 수와 인쇄 부수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번 상담에서는 대면 취재를 포함한 인터뷰, 디자인과 인쇄 등의 과업을 전제로 약 1,200만 원 수준의 예상 비용을 안내했다. 다만 이는 상담에서 확인한 조건을 바탕으로 한 개략적인 금액이다. 같은 80쪽, 600부라도 취재 범위와 이동 지역, 촬영 방식 등 구체적인 과업에 따라 견적은 달라질 수 있다. 이 숫자를 모든 사례집에 적용되는 정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어떤 작업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사진은 ‘촬영 포함’이라는 말만으로 서로 같은 결과물을 떠올리기 어렵다. 이번 상담에서는 취재 에디터가 스트로보를 갖춘 DSLR로 현장을 촬영하고, 이후 사진 보정까지 진행하는 방식을 설명했다. 한편 표지용 스튜디오 촬영이나 드론 촬영을 원한다면 별도의 비용이 더해질 수 있다고 안내했다. 원하는 사진의 용도와 분위기가 있다면 미리 알려주는 것이 좋다. 사례 본문에 들어갈 현장 사진과 별도로 연출한 표지 사진은 준비 방식부터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견적을 문의하기 위해 처음부터 완벽한 과업지시서를 만들 필요는 없다. 책의 성격, 예상 분량과 부수, 인터뷰 건수와 방식, 섭외 진행 상황, 희망 납품일을 정리한 간단한 문서만 있어도 상담을 훨씬 구체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기관의 특성이나 꼭 담아야 할 내용, 원하는 촬영 범위까지 덧붙이면 제작사도 그에 맞춰 일정과 비용을 검토할 수 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항목은 미정이라고 적어두면 된다.
사례집을 의뢰하는 담당자에게 내가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조언은, 제작사에 연락하는 시점부터 섭외와 자료 준비도 함께 시작해달라는 것이다. 책에 담을 사람이 정해지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들을 수 있는지가 확인되어야 집필과 편집도 안정적으로 이어진다. 일정이 촉박할수록 이 준비가 중요하다. 현장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제대로 다듬을 시간을 확보하는 일, 그것이 좋은 사례집을 만드는 첫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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