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아날로그
- 리퍼블릭 편집부
- 7월 1일
- 4분 분량

한때의 이해하지 못할 열정으로는 사랑, 우정 같은 것들이 있다. 그 시절엔 왜 그 남자를 사랑했던 걸까. 그 형님이랑 뭐가 죽이 잘 맞아서 희희낙락거리고 평생 밥 먹는 사이로 남을 것처럼 굴었을까, 지금은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로 남았으면서...핏줄보다 약한 게 동창이고, 사회에서 만난 친구는 그보다 느슨한 관계라는 건 알지만, 가끔 예외도 있다. 내가 아는 가장 특이한 경우는 한때 네다섯의 소위 사회에서 상처받은 사람들로, 프리랜서로 같은 일을 하면서 만나 친해져 ‘운명공동체’임을 자부했던 이들이다.
한 농부의 딸은 노처녀로 살아갈 결심을 하다가 밥벌이를 위해 일을 배우다가 이들을 만났고, ‘돌싱남’은 영상 촬영 일을 하다가 부업 삼아 시작한 일로 모임을 통해 이들 그룹을 알게 되었다. 같은 일을 한다는 공통점 외에도 각자의 사연, 각자의 상처가 얽혀 어떤 화학적 작용을 한 것인지 이들은 자녀양육권 소송에 얽혀 잠적한 전처로부터 아이를 데려오는, 흡사 007 영화를 방불케 하는 돌싱남의 일을 돕기도 하는 등 서로의 인생사를 한 편의 영화처럼 편집하곤 했다.
누구보다 먹고사니즘이 퍽퍽한 사람들이 주말마다 몰려다니며 영화를 보러 가고, 다른 사람의 집을 대신 구해주거나 돈을 빌리고 갚아주는 것처럼 물적, 시간적 에너지를 퍼주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때는 ‘저런 친구들이 있어서 좋겠다’고 철없이 부러워했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그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면 절대로 결집될 수도, 유지될 수도 없는 모임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이 그렇게 했던 건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시간이 남아 돌아서도 아닌, ‘위로받기 위해서’였다.
위로는 아날로그
불완전한 사람들의 목적 없는 시간 소모. 만남 그 자체에, 행위 그 자체에 몰두하는 이들의 만남은 "위로 받는다"는 이유로 수렴되었다. 그 과정에서 같은 일을 하며 품앗이처럼 일을 한다는 생계의 목적이 그럴 듯한 알리바이가 되었지만,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면 기왕에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재미있게 일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다는 점에서, 무의식적으로나마 삶의 방향을 제대로 짚은 사람들이었다. 일각에서는 ‘잉여 인간 모임’이라며 비웃었지만...잉여 인간의 불완전한 행위들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재미의 특징 중 하나가 아닌가! 실수투성이에다가 때론 법적 위험에 휘말리기도 하고, 개개인을 떼어 놓고 보면 사회적으로는 그다지 매력이 없어 보이는 이들은 행복해보였다.
바보 멍충이를 용인하지 않는 요즘의 시선으로 보면 이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 시간에 모여서 작당을 하고 해결 불가능한 남의 사생활에 끼어들면서 싸우는 등 오합지졸처럼 보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결국 우린 만나서 굳은 살처럼 박인 서로의 정이나 깎아 먹고 마는 관계였음을 깨달았을 때, 이 모임도 결국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물론 돈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무리 중 다른 일을 하기로 결정한 이탈자가 하나둘씩 나오면서 자연스레 와해되는 수순이었다. 그 모임에서의 경험으로 그들이 더 성숙해을까. 애초에 그들은 철이 들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즉 아날로그형 인간이었기 때문에 일을 핑계 삼아 자력처럼 서로에게 끌린 것은 아니었을까.
아날로그가 이렇다. 귀퉁이가 낡고 찢어지고, 색이 바래버리는, 언젠가는 새것으로 교체되는 벽지처럼 아날로그식 관계 또한 매끄럽지 않고 너덜너덜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디지털의 세상에서 편리함을 체험하고 나서, 울퉁불퉁한 관계의 모서리에 다치는 게 싫어서 유튜브 영상을 순회하며 댓글만 남기는 것이다. 하지만 코딩의 언어 역시 AI가 등장하기 전에는 개발자인 인간의 수작업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면, 여전히 세상의 기초는 아날로그이다. 언젠가 어느 사업가가 어느 시골에 도로를 몇 미터를 까는 데도 수천 만원이 들어가는 걸 알기에 자신은 세금을 내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매일 그 도로를 편리하게 차로 운전해서 출퇴근을 한 덕분에 자신이 시간을 아끼고 사업에 집중해서 돈을 벌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내가 기여한 게 없지만 그 덕분에 잘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경제적 통찰이라면, 사람의 관계는 계산된 주고받음인 디지털이 아닌 수많은 실수와 허점과 불합리의 역설로 짜였음을, 다시 말해 아날로그식으로 구성되었음을 깨닫는 것은 영적 깨달음이다.
아날로그가 중요한 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문법적으로 완벽한 챗지피티의 글보다, 서툴게 쓴 아이들의 시가 감동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기억하는 좋은 글은 대부분 ‘몸으로’ 쓴 글들이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머리까지 써야 하는 비효율적 취미인 독서를 왜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지식이나 통찰을 얻기 위함이라는 답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는다. 글을 읽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 너머에 있는 ‘감동’을 얻기 위해서다. 감동? 그렇다. 유튜브 영상을 보고서도 얼마든지 감동할 수 있지만 자아가 건드려지려면 어쩔 수 없이 모종의 글을 찾아서 읽어야 한다. 어지간히 유튜브도 보고, 그보다 더 지독하게 책을 읽는 입장이지만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 안에 ‘무언가’가 불쑥 건드려져서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의 끝에는 항상 책 속의 글이었던 것 같다.
상처는 아날로그
아날로그식 글쓰기와 아날로그식 삶에는 ‘상처’라는 공통점이 있다. 글 속에 담긴 상처는 피하거나 숨길 데가 없다. 날것의 감정과 생각이 텍스트 안에서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피하고 싶은 사람은 영상을 보지만, 상처를 마주하고 싶은 사람은 글을 쓴다. 상처를 받는 삶도, 그 상처를 들여다보는 글쓰기라는 과정도 모두 아날로그다. 내 생각과 감정이 아무리 디지털식으로 ‘최적화’된다고 해도, 결국 나는 오늘도, 내일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이 아날로그의 방식이다
디지털은 반복된 수정을 피하기 위해 문제를 발견하고, 코드를 수정한다. 아날로그식이라면 처벌과 교정 작업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수정 이후에는 오류가 없는 디지털과 달리 사람은 계속해서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아날로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실수를 할 때마다 처벌과 교정을 반복하는 것은 디지털인 기계의 방식으로 아날로그 방식인 인간을 다루는 게 아닐까. 누가 더 실수를 잘 잡아내느냐의 게임에서, 인간은 디지털을 이길 수 없고 디지털에게 주도권을 내어줄 수밖에 없다. 합리적으로 보자면 결국 인간이 AI에게 지배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다.
용서는 아날로그
인간의 인간다움은, 아날로그인 인간의 특이점은 ‘용서’이다. 동물은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리 편의 배신에는 보복과 처벌이 뒤따른다. 처벌의 방식에서는 인간도 동물의 방식을 따른다. 하지만 용서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어떤 마음에 상처를 발견했는데 그 상처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발목 잡혀 있으면 그 경험에 제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다. 나를 디지털식으로 다룬다면 스스로를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아날로그의 의미를 안다면, 상대방 또는 나의 행위를 합리성과 당위성으로 보는 관점에서 조금 더 벗어날 수 있다. 눈앞에 펼쳐진 사건은 용서를 위한 일련의 ‘스토리’일 뿐이다. 상처를 받은 자만이 상처입은 자를 용서할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평생을 상처 입어갈 것이므로, 결국엔 나 또한 상처받는 아날로그형 인간임을 받아들이고, 나 자신과 상대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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