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 제작 회사,기획제안의 능력이 중요합니다


얼마 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한 공공기관에서 여러 대학의 연구 성과를 모아 백서를 만들고 있는데, 그 담당 부서였다. 원래 담당자분이 연차라서 다른 분이 대신 연락하셨다. 며칠 전 보내 드린 표지 시안과 내지 구성안에 대한 의견이었다.
“표지는 1번이랑 3번 같은 느낌 말고, 2번처럼 깔끔한 느낌으로 가 주시면 좋겠어요. 내지는 매거진형으로요.”
그런데 끊고 나서 한참 그 통화를 곱씹었다. 백서를 만드는 일에서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다 들어 있었다. 기획제안이다.
사람은 보고 나서야 고를 수 있다
“2번처럼 깔끔하게”라는 말은 방향으로는 충분하지만 디자이너가 손을 움직이기엔 부족하다. 그래서 여쭤봤다. 색감은 어떻게 할지, 가운데 그려 놓은 일러스트 대상은 그대로 둘지, 다른 그림을 원하시는지.
돌아온 답은 이랬다. “그건 채색 있는 버전을 보고 나서 결정해야 될 것 같아요. 어느 정도까지 채색이 들어가는지를 모르니까.”
맞는 말이다. 이걸 고객이 결정을 미룬다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사람은 원래 그렇다. 머릿속에 없는 걸 말로 고를 수는 없다. 눈앞에 놓여야 고른다.
그래서 기획제안의 첫 번째 일은 ’고를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드리는 일이다. 이번 표지는 이렇게 좁혀 가기로 했다. 처음 세 가지 방향 중 2번이 골라졌으니, 그 안에서 변주를 여러 개 만든다. 채색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제목 타이포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바탕색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담당자분이 그중에서 고르시면, 그걸로 완성도를 확 올린 시안을 한 번 더 드린다.
세 개에서 하나, 하나에서 여러 변주, 변주에서 다시 하나. 한 번에 정답을 맞히려 하지 않고, 고객이 판단할 수 있는 순서를 짜는 것. 나는 이게 시안을 ‘잘 그리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반응을 원칙으로 바꿔 듣기
내지는 두 가지 구성안을 드렸었다. 하나는 ’성과 우선형’이다. 인포그래픽을 앞쪽에 모아 성과를 먼저 보여 주고, 뒤에서 글로 풀어 간다. 다른 하나는 ’매거진형’이다. 글이 흐르다가 중간중간 인포그래픽이 나온다.
담당자분은 매거진형을 고르셨다. 이유는 이랬다. “성과 우선형은 글이 너무 몰려 있는 걸로 보여서요.”
같은 내용이라도 인포그래픽을 앞에 모으느냐, 글 사이에 놓느냐에 따라 읽히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 적으면 ’글을 덜 몰리게’가 된다. 그런데 실제로 하신 말씀을 풀어 보면 이렇다. 그림은 그림대로, 글은 글대로 덩어리지면 읽기 힘들다. 글을 읽다가 숨 돌릴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확인하듯 다시 말씀드렸다. 글이 나오고 중간에 인포그래픽이 나오는 게 좋다는 말씀이시죠. “네, 맞아요.”
고객의 반응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온다. “이건 좀 답답해요”, “저건 너무 화려해요”. 기획하는 사람은 그 말을 다음 시안에 쓸 수 있는 원칙으로 번역해야 한다. 번역이 틀리면 다음 시안도 빗나간다. 그래서 나는 통화 중에도 꼭 한 번은 내 말로 다시 정리해서 여쭤본다. 틀렸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잡을 수 있다.
구성안을 ‘성과 우선형’, ’매거진형’처럼 이름 붙여 드리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름이 있으면 고객이 고르기 쉽고, 왜 그걸 골랐는지 말하기도 쉽다.
제안이 꺾였을 때 남는 것
이번 백서에는 대학마다 연구 과제가 하나씩 들어간다. 그중 몇 곳은 우리가 직접 현장 취재를 했고, 나머지는 결과 보고서를 바탕으로 쓴다. 처음엔 취재한 곳과 안 한 곳의 분량을 다르게 가자고 제안했다. 취재한 곳은 담을 이야기와 사진이 많기 때문이다.
기관의 판단은 달랐다. 모든 대학을 4쪽으로 똑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여러 대학을 함께 싣는 책이니 충분히 이해되는 결정이다.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기획이 끝나는 건 아니다. 분량을 똑같이 맞추면 차이를 어디에 둘지 다시 정해야 했다. 취재한 곳에는 농가나 함께 일한 기업의 이야기를 담은 박스 인터뷰가 들어간다. 취재하지 않은 곳에는 그 박스가 없다. 사진도 다르다. 직접 찍은 사진이 없는 곳은 대학에 요청해서 받은 자료로 채우는데, 페이지 위쪽에 사진을 크게 까는 구성은 어렵다. 그래서 담당자분께 미리 말씀드렸다. 취재한 곳으로 내지 시안을 먼저 보여 드리겠지만, 취재 안 한 곳은 사진이 크게 들어가는 부분이 없을 거라고.
나중에 시안을 보고 “왜 여긴 사진이 작아요?”라는 질문이 나오기 전에 먼저 꺼내 두는 거다. 기획제안은 처음 한 번 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결정이 바뀔 때마다 그 결정이 책의 어디를 바꾸는지 따라가며 다시 짜는 일이다.
누가, 어떤 순서로 확인할지도 기획이다
취재하지 않은 대학의 원고는 결과 보고서로 초안을 잡았다. 그걸 바로 기관에 보내지 않았다. 먼저 각 대학의 교수님들께 보내 리뷰를 받았다. 내용을 가장 잘 아는 분들이 먼저 보고 확정한 원고를 기관이 검수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앞서 담당자분과도 그렇게 이야기가 됐다.
순서를 거꾸로 하면 어떻게 될까. 기관이 먼저 읽고 고친 원고를 교수님이 다시 고치면, 기관은 같은 원고를 두 번 봐야 한다. 백서 일정이 밀리는 건 대개 이런 데서다.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같은 걸 여러 번 확인해서 밀린다.
교수님들 리뷰를 요청할 때 하나를 더 여쭤봤다. 박스 인터뷰에 넣을 농가나 산학협력 기업이 정말 없는지. 처음 연락했을 때 마땅한 대상이 없다고 하신 곳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없으면 박스 없이 가고, 있으면 자료를 달라고 했다. 대학마다 조금씩 차이가 날 거라고 담당자분께도 말씀드렸다.
일정도 같은 방식으로 짰다. 교수님들 피드백을 받기로 한 날까지 다 모이면 원고를 한 번에 드린다. 몇 분이 늦으시면 된 분들 것부터 1차로 드리고, 나머지는 그다음 주에 2차로 드린다. 한 분이 늦는다고 전체가 멈추지 않게 하는 것. 이것도 기획이다.
기획제안이 결국 하는 일
백서를 맡기는 분들은 대개 디자인 실력이나 글솜씨를 먼저 보신다. 둘 다 중요하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해 보면 결과를 가르는 건 그 앞 단계인 경우가 많다.
무엇을 몇 개 보여 드릴지. 그 차이가 무엇인지 이름 붙여 설명할 수 있는지. 고객의 반응을 다음 시안의 원칙으로 바꿔 들을 수 있는지. 결정이 바뀌면 그 영향이 어디까지 가는지 미리 짚어 드리는지. 누가 어떤 순서로 확인할지 정해 두는지.
백서 제작에서 기획제안 능력이 중요하다는 건, 결국 그런 소통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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