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제작 인생의 레시피를 밀키트로...?
- 리퍼블릭 편집부

- 9월 16일
- 2분 분량

어제는 아내가 주문한 밀키트로 저녁을 먹었습니다. 근사한 레스토랑의 메뉴를 집에서 즐긴다는 설명서에, 마음이 한껏 부풀더군요. 시키는 대로 재료를 넣고 볶고 끓이니, 제법 그럴듯한 음식이 완성되었습니다. 중요한 건, 그 음식이 맛있었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래서 그 안에 요리사의 ‘혼’이 담겨 있었냐, 아니냐죠. 저는 후자라고 느꼈습니다.
자서전 작가는 연말이 가장 분주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결실을 맺고 싶어 하고, 누군가에게 그 결실은 바로 ‘책’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요즘도 저는 다양한 분들을 만나, 그분들의 세계를 엿보는 ‘인터뷰’라는 즐거운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문득, 며칠 전에 저를 찾아오셨던 한 기업의 회장님이 생각나더군요. 평생 일군 기업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이제 당신의 삶을 정리하고 싶다며 말문을 여셨습니다. 한참을 이야기 나누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요즘 자서전 만들어주는 AI도 있던데, 그걸로 하면 간단하지 않을까요?"
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어젯밤 먹었던 밀키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정해진 레시피에 정량의 재료를 넣으면 누구나 비슷한 맛을 낼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식당 주방장의 ‘손맛’을 따라갈 수는 없는 법이라고. AI가 바로 그 밀키트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AI가 던지는 질문은 늘 정해져 있습니다. 태어난 곳, 자란 환경, 성공과 위기… 그 질문에 답을 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모범 답안’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은 정해진 질문 몇 개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그 질문들 사이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회장님, 저는 궁금합니다. 모두가 안 된다고 말렸던 그 사업에 왜 전 재산을 거셨습니까? 그날 밤 잠은 주무셨습니까? 사모님께는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AI는 결코 ‘왜?’라고 되묻지 않습니다. 사용자가 입력한 ‘사실’을 보기 좋게 배열해 줄 뿐, 그 사실 뒤에 숨은 감정과 철학, 고뇌의 흔적까지 파고들지는 못합니다. 인생의 행간(行間)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제가 유념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상대의 인생에서 진짜 ‘레시피’를 복원해 줄 것. 제가 하는 일은 단순히 글을 대신 써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터뷰라는 과정을 통해 당사자조차 잊고 있던 인생의 ‘결정적 재료’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이 어떤 순서와 조합으로 지금의 당신을 만들었는지, 그 고유한 레시피를 글로 복원해 내는 일입니다.
어쩌면 챗지피티로 쓰는 것이 더 빠르고 저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서전은 효율로 만드는 공산품이 아닙니다. 비용을 아끼려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왜?’라는 질문을 던질 기회를, 그 질문을 통해 나 자신을 깊이 있게 돌아볼 성찰의 시간을 통째로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이 일의 본질이라 믿습니다.
인공지능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는 잘 모르겠고,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지에 대해서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자서전의 본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유감없이 다 한 것 같습니다. 특히 ‘인생의 레시피를 복원하는 일’이라는 것이 제가 내린 자서전 작가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자서전 작가가 예술을 한다는 건 오해입니다. 이 분야는 철저히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그의 인생이라는 결과물을 책이라는 완성품으로 약속한 날짜에 맞춰 ‘납품’하는 일련의 지난한 공정을 따릅니다. 다만, 그 결과물은 밀키트처럼 규격화된 ‘제품’이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이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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