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남이 써도 되나요?"자서전 대필 시장의 빛과 그림자
- 리퍼블릭 편집부

- 8월 8일
- 3분 분량

"내 인생을 남이 써도 되나요?"
자서전 대필 시장의 그림자와 빛
"제가 겪은 건 정말 소설보다 더 극적이에요. 하지만 막상 쓰려니까..."
김모(54) 대표는 말끝을 흐렸다. 20년 전 보증금 300만원으로 시작한 온라인 쇼핑몰이 지금은 연매출 100억원 규모로 성장했다. IMF, 카드대란, 코로나19를 모두 버텨냈다. 실패와 재기를 반복하며 쌓아올린 경험담은 어떤 경영서보다 생생하다.
"그런데 막상 글로 쓰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시간도 없고요."
김 대표가 찾은 해법은 '자서전 대필'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전문 작가가 대신 써주는 서비스다.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개념이지만, 최근 들어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대필의 세계
자서전 대필 시장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거래가 비공개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연간 수백 건의 대필 의뢰가 오가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한다.
출판업계 한 관계자는 "5년 전만 해도 자서전 대필을 의뢰하는 사람은 정치인이나 대기업 총수 정도였다"면서 "최근에는 중소기업 사장, 의사, 변호사, 심지어 블로거까지 다양한 계층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개인 브랜딩의 중요성이 커진 시대적 흐름이 있다. 과거엔 성공한 뒤에 회고록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이제는 성공을 위한 도구로 자서전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글 못 써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자서전 대필을 의뢰하는 이유는 예상보다 복잡하다. 단순히 '글을 못 써서'가 아니다.
대필 전문업체 '리퍼블릭미디어'의 오모 대표는 "의뢰인 대부분이 고학력자"라며 "문제는 글솜씨가 아니라 시간과 객관성"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자서전 한 권을 완성하려면 최소 6개월에서 1년이 소요된다. 자료 수집부터 인터뷰, 집필, 퇴고까지 일반인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작업량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독자가 흥미를 느낄 만한 서사로 구성하는 일은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이다.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한 한 벤처기업가는 "글 쓰는 건 자신 있었는데, 막상 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려니 너무 어려웠다"며 "어떤 에피소드를 넣고 빼야 할지, 어떤 순서로 배열해야 독자가 지루해하지 않을지 감이 안 잡혔다"고 털어놓았다.
대필가들의 속사정
한국의 자서전 대필가는 대부분 언론인 출신이다. 인터뷰 기법과 글쓰기 경험을 바탕으로 이 분야에 뛰어든 경우가 많다.
20년간 경제지 기자로 일하다 프리랜서 대필가로 전향한 이모(48)씨는 "기사 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기사는 팩트를 전달하는 게 목적이지만, 자서전은 한 사람의 삶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 사람만의 어투와 사고방식, 가치관까지 글에 녹여내야 하니 어렵죠."
대필가의 수입은 프로젝트 규모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 한 권당 300만원에서 3000만원 선에서 결정된다. 의뢰인의 사회적 지위, 작업 난이도, 마감 일정 등이 변수로 작용한다.
하지만 단순히 돈벌이로 접근하기엔 한계가 있다. 한 권을 완성하기까지 최소 수십 시간의 인터뷰와 자료 조사가 필요하고, 때로는 의뢰인의 사생활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부담도 따른다.
진실성의 딜레마
자서전 대필을 둘러싼 가장 큰 논란은 '진정성' 문제다. 남이 대신 써준 책을 과연 '내 책'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다.
이에 대해 업계는 "대필의 본질은 대화와 협업"이라고 반박한다. 모든 내용은 의뢰인의 경험과 생각에서 나오고, 대필가는 이를 독자가 읽기 쉽게 정리하는 역할에 그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회색지대는 존재한다. 의뢰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을 대필가가 추정해서 채우거나, 극적 효과를 위해 일부 사실을 각색하는 경우도 있다. 한 대필작가는 "완전한 팩트체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의뢰인이 기억하는 내용과 실제 사실 사이에 괴리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까지 검증하기는 어렵다"고 고백했다.
법적 사각지대
자서전 대필은 법적으로도 애매한 영역이다. 저작권법상 '저작자'는 실질적으로 창작한 사람을 의미하지만, 자서전의 경우 내용의 주체와 표현의 주체가 다르다.
지적재산권 전문 변호사 김모씨는 "현행법으로는 자서전 대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며 "향후 관련 분쟁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대필 작가와 의뢰인 사이의 권리 분쟁이 종종 발생한다. 저작권 귀속, 수익 배분, 공개 범위 등을 명확히 계약서에 명시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다.
새로운 출판 생태계
자서전 대필 시장의 성장은 출판업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엔 유명인의 자서전만 출간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지만, 이제는 '보통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도 주목받고 있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요즘 독자들은 화려한 성공담보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선호한다"며 "자서전 대필을 통해 양질의 콘텐츠가 더 많이 발굴되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대필 시장이 커질수록 '진짜 자서전'과 '가짜 자서전'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독자의 알 권리와 출판계의 투명성 확보가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김 대표의 자서전은 6개월 만에 완성됐다. 300페이지 분량의 책에는 그의 20년 창업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패의 쓰라림, 재기의 기쁨,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까지.
"처음엔 남이 써준 책이라 어색할 줄 알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제 목소리가 그대로 살아 있더라고요."
김 대표는 이 책을 직원들과 거래처에 나눠줬다. 그의 경영 철학과 가치관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예상치 못한 효과도 있었다. 책을 읽은 한 대학교에서 특강을 요청해왔고, 경영 컨설팅 의뢰도 들어왔다.
"돈을 벌려고 쓴 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새로운 기회들이 생겼어요. 무엇보다 제 인생을 정리할 수 있어서 만족합니다."
자서전 대필, 그 찬반의 경계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다. 누구나 기록될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는 것. 문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세상에 내놓느냐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대필이라면, 중요한 건 누가 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담았느냐가 아닐까.
한국 사회가 성숙할수록 다양한 개인의 목소리가 기록되고 공유돼야 한다. 자서전 대필은 그 과정에서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다. 핵심은 투명성과 진정성의 균형을 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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