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40편을 묶어 시집 한 권을 냈다
- 리퍼블릭 편집부

- 2일 전
- 3분 분량
회사원 M씨는 퇴근 후 5년간 쓴 시를 모아 시집을 내고 싶었다. 문예지 등단 경력은 없었다. 기획출판은 등단 시인이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비출판을 결심하고 과정을 시작했다.
원고 정리에 한 달이 걸렸다. 노트와 스마트폰 메모에 흩어져 있던 시 80여 편 중 40편을 추렸다. 편을 고르는 기준은 두 가지였다. 내가 다시 읽어도 감정이 살아 있는가, 그리고 독자가 읽었을 때 맥락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가. 80편을 40편으로 줄이는 과정이 시집 기획의 핵심이었다. 시의 배열도 중요했다. 계절 순서, 감정의 흐름, 밝은 시와 어두운 시의 완급 조절을 고려해서 4부로 나눴다.
편집에서 시집은 일반 산문과 다른 점이 있다. 시는 줄바꿈, 연 나눔, 들여쓰기가 의미를 가진다. 편집자가 가독성을 위해 줄바꿈을 바꾸거나 연을 합치면 시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M씨가 선택한 출판사에서는 시 편집 경험이 있는 편집자가 배정되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만 교정하고, 줄바꿈과 구성은 저자의 의도를 그대로 존중하는 방식이었다. 편집비 40만 원.
시집 디자인은 일반 서적보다 자유도가 높다. M씨는 한 페이지에 시 한 편만 배치하는 여백 중심 레이아웃을 원했다. 40편이면 본문 40페이지에 제목 페이지, 차례, 서문, 후기를 합하면 약 60~70페이지가 된다. 시집이 얇아도 괜찮다. 시집은 원래 얇은 것이 자연스럽다. 판형은 사국판(127×188mm)으로 결정했다. 일반 단행본(신국판)보다 작아서 손에 쥐는 느낌이 좋고, 시집에 어울리는 크기다. 표지는 시의 분위기에 맞는 수채화 느낌의 일러스트를 디자이너에게 의뢰했다. 디자인비 표지+내지 합계 80만 원.
인쇄에서 가장 고민한 것은 부수였다. 100부를 찍으면 권당 단가가 높고, 200부를 찍으면 절반이 남을 것 같았다. 결국 100부로 결정했다. 사국판 70페이지 흑백 본문+컬러 표지, 무선제본 100부. 인쇄비 50만 원. 충무로 디지털 인쇄소에 직접 의뢰했다. 부크크 POD를 쓸 수도 있었지만 용지를 직접 선택하고 싶었다. 시집은 용지의 질감이 읽는 경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M씨는 미색 모조지 100g을 선택했다. 백색보다 눈이 편하고 시를 읽는 분위기에 어울린다.
총비용은 편집 40만 원, 디자인 80만 원, 인쇄 100부 50만 원, ISBN 발급+서점 유통 20만 원. 합계 190만 원이었다. 시집 자비출판 시장에서는 합리적인 수준이다. 200만 원 미만으로 시집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분량이 적고(70페이지), 흑백 본문이고, 인쇄 부수를 100부로 줄인 덕분이다.
판매 현실도 솔직하게 말하면, 첫 달 판매 8권이었다. 시집은 가장 안 팔리는 장르다. M씨도 판매를 기대하지 않았다. 100부 중 40부를 지인에게 나눠주고, 20부는 독립서점 위탁 판매에 맡겼다. 나머지 40부 중 서점에서 팔린 것은 3개월간 14권이다. M씨가 가장 기뻤던 것은 인스타그램에서 모르는 독자가 자기 시집 사진을 올린 것이었다. 시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퇴근길에 읽었는데 울컥했다는 댓글이 달렸다.
시집의 유통 경로는 일반 서적과 다르다. 교보문고 같은 대형 서점보다 독립서점에서의 반응이 더 좋은 경우가 많다. 서울의 독립서점(더북소사이어티, 유어마인드, 스토리지북앤필름 등)에 위탁 판매를 신청하면 같은 취향의 독자에게 도달할 수 있다. 위탁 수수료는 정가의 30~40%가 일반적이다. 독립서점은 소량 입고(3~5권)가 가능하고 서점 주인이 직접 추천해주는 경우도 있어서 대형 서점보다 판매 전환율이 높다.
인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커뮤니티에서 시집은 사진 콘텐츠로 강점이 있다. 시 한 편을 손글씨로 쓰거나 예쁜 배경 위에 올려서 이미지로 만들면 공유가 잘 된다. M씨도 출간 후 인스타그램에 시를 한 편씩 올렸는데, 팔로워 800명 중 좋아요가 80~150개씩 달리며 자연스럽게 구매 링크 클릭이 발생했다.
시집 자비출판에서 비용을 더 줄이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표지 일러스트를 직접 그리거나 무료 이미지를 활용하면 디자인비를 30만~50만 원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 둘째, 내지 디자인을 직접 잡으면 추가 절감이 된다. 인디자인 대신 한글이나 워드로도 시집 레이아웃은 충분히 잡을 수 있다. 셋째, POD로 전환하면 인쇄비 50만 원을 절약할 수 있다. 다만 용지 선택의 자유가 사라지고 권당 단가가 높아진다.
시집을 교보문고에 올릴 때 카테고리를 한국 시로 정확히 잡아야 한다. 에세이나 인문으로 잘못 분류하면 시를 찾는 독자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서점 내 한국 시 카테고리는 경쟁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신간 노출이 잘 되는 편이다. 시집 독자는 충성도가 높아서 한 번 좋아하면 같은 저자의 다음 시집도 구매하는 패턴이 있다. 첫 시집에서 독자 5~10명만 확보해도 두 번째 시집부터는 초기 판매가 안정된다.
시집은 가장 상업적이지 않은 장르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자비출판이 가장 자연스러운 장르이기도 하다. 판매가 아니라 작품을 한 권의 형태로 완성하고,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건넬 수 있다는 것. 독립서점에 위탁하면 같은 취향의 독자를 만날 수도 있다.
전자책으로 시집을 병행 출간하면 비용 부담 없이 독자층을 넓힐 수 있다. 시집은 텍스트 위주이므로 ePub 변환이 간단하고, 전자책 정가를 3,000~5,000원으로 낮게 잡으면 진입 장벽이 낮아진다. 밀리의 서재 같은 구독 서비스에서 시집을 가볍게 읽어보는 독자도 늘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자기 시를 한 권으로 묶어보는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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