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필작가 어느 고스트라이터의 고백
- 리퍼블릭 편집부
- 5월 15일
- 4분 분량

어느 고스트라이터의 고백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고 설명하면 조금 편하다. 7살 딸아이가 유치원에서 아빠 직업을 말할 땐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요”로 통한다. 그러다 간혹 업종 분류가 아닌 ‘직무’를 따져 묻는 까다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럼 글을 쓰시는 건가요?”하고 탐문하면 그땐 도리 없이 ‘주특기’를 밝혀야 한다. 요컨대 상대가 ‘당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로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궁금하다’고 물어올 때는 솔직하게 답해야 한다.
“아, 저는 대필작가입니다. 다른 사람의 글을 대신 써주고 있어요. 고스트라이터라고도 하는데...”
굳이 고스트라이터라고 한 마디 보태는 이유는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다. 음지에서 일한다는 뉘앙스, 혹은 다소 편법적인 일을 한다는 의구심은 상대의 표정에서 감춰지지 않는다. 직업을 말하고 나면 뒷말이 궁색해지곤 해서 언젠가부터 “작은 출판사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코멘트를 정리했다. 이렇게 하면 자기소개가 깔끔해지고 이후 대화가 편해진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출판업을 돈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신념을 좇아서 일하는 고상한 직업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요컨대, ‘대필작가’보다는 ‘출판 편집자’가 덜 상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대표님으로 불릴 수 없는 사업가
아무튼 나는 수년 간 다른 사람의 글을 대신 써주고 돈을 버는 일을 생업으로 삼아왔다. ‘최 실장님’이나 ‘정 프로님’처럼 나 또한 대외적으로는 ‘작가’라는 호칭으로 불리곤 하는데,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버젓이 대표이사로 이름이 올라 있어도 결코 ‘대표님’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다. 출판사를 차렸든 어쨌든 간에 원고를 써서 돈을 버는 흔치 않은 직업인은 사람들의 눈에 ‘작가’로 호명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여전히 글을 쓰는 걸까?’
챗지피티가 윤문과 교정까지 도맡아 해주는 충격적인 시대에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활자로 소통하는 시대는 진작에 지났고 익명의 어른들은 짧은 영상과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요즘, 초등학생들의 채팅방 소통조차 문장의 주술 관계가 무의미한 초성으로 이뤄져있는데 말이다. 어떤 사람은 글의 여전한 힘을 ‘생각하는 능력’에 빗대어 그럴 듯하게 설명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의사결정 하나가 가치를 좌우하는 상위 몇 퍼센트의 '사회지도층'들에게나 해당하는 얘기다.
보통 사람은 적잖은 시간이 소모되는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사유씩이나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필요한 정보는 검색하면 되고 인터넷에서는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할 때도 생성형 AI에게 명령하면, 중언부언 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만들어준다. 유튜브 앱을 열면 조회수를 얻기 위해 나 대신 앞다퉈 여러 관점의 생각까지 대신 해주는 수많은 채널들의 영상들이 쏟아지는데, 굳이 왜 귀찮게 생각해야 할까. 그 수많은 관점 중 내 상황과 가치관에 맞는 생각을 뒤따르면 될 텐데. “너만의 관점과 생각을 가지라”는 충고는 여가 시간도 부족한 보통 사람들에겐 사치일지도 모른다. 더 좋은 콘텐츠를 골라서 소비하기에도 우리에겐 시간이 부족하다.
생각을 ‘아웃소싱’하는 사람들
어쩌면 그 때문에 대필작가라는 직업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글을 쓴다는 건 내가 어떤 주제에 관해 얼만큼 생각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과정이니까. 대필작가에게 두둑한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생각을 ‘아웃소싱’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연예인, 기업인, 전문직에 종사하며 자신이 글을 쓰는 시간보다 그 과정을 대필작가에게 맡기고 본업에 충실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들 덕분에 내가 먹고 사는 지도 모른다.
문제는 보통 사람들이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유명해질 필요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 글을 쓰고 출판하는 일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 건가. 시중의 어떤 책쓰기 강의는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는데 그래도 수강생이 몰리는 걸 보면, 글쓰기에 대한 열망은 유튜브 영상을 찍듯 타인에 대한 말을 걸거나, 혹은 영향력을 미치는 것과는 다른 방향성을 가진 무언가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번거롭게 어려운 데다 시간도 오래 걸리는 글쓰기에 여전히 많은 이들이 몰두하는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10년 가까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질문하며 상대의 무의식에 잠들어 있는 생각을 깨우며 이를 글로 대신 표현해주는 일을 해오다 보니 사람들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유튜버들은 자기를 알리는 데 열심이다. 내면에 있는 걸 밖으로 끄집어내어 구독자와 공감하는 게 목표다. 반면, 글을 쓴다는 건 오히려 반대의 방향이다. 쓰면 쓸수록 타인에게 나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내 안을 파고들어간다. 마치 구심력과 원심력의 차이처럼 말이다. 유튜버들이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향해 자꾸만 원의 반경을 넓히려 한다면, 글을 쓰는 사람은 구심력처럼 내 안의 깊숙이 찍혀 있는 한 점의 핵을 찾아서 반경을 좁힌다.
글을 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궁금하다. 평생을 자아와 동행하며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내가 누구인가’ ‘내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그럴 듯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래서 경계가 정해진 나를 사람들에게 표현하려들기보다, 여전히 경계 사이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듯한 스스로를 발견하기 위해 무의식의 세계를 표류한다. 글을 쓴다는 건, 이런 무의식의 어딘가의 나를 찾기 위한 탐구이자 여정이다.
평범한 이들 중 자기 자신을 탐구하기 위해 글을 쓰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그들은 상담 테이블에서 나와 마주 않은 채 어딘가 쭈뼛거리며 어찌 보면 좀 홀린 듯한 표정으로 자기가 쓴 원고 종이를 부스럭거리면서 가방에서 꺼낸다.
어떤 중국 동포는 어릴 때 팔려 가듯 입양되어 그 회한에 사무쳐 그동안 축적한 막대한 재산으로 고국의 청년의 창업을 돕는 재단을 만드는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자 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쓴 원고가 대통령을 바꾸리라는 확신으로 가명으로 책을 내달라 한다.
이들이 전부 미친 건지, 사기꾼인지, 그것도 아니면 소설가보다 더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인 건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가끔씩 나는 그런 이들과 상담을 하는 어느 순간에, 시대를 착오하는 듯한 혼곤함이 들기도 하다. 색바랜 노트에 손으로 쓴 글을 펼쳐 보이면서 ‘이 글이 세상을 바꿀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그들이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어쩌면 ‘이 글이 나를 바꿀지도 모른다’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세상에서는 자기가 주인공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믿고 있는 상대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 세상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란 없으니까.
K100처럼 수많은 블랙의 세계
가끔은 타인의 생각이 상식을 벗어난 것 같고, 정상이 아닌 사고를 가진 것 같아도 이는 내 인생의 경계 안에서일 뿐이다. 우리는 검정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 “저 사람 블랙을 좋아하나봐”라고 하지만, 그 블랙은 내가 아는 그 블랙이 아닐 수 있다.
편집 디자인을 배우다 보면, 똑같은 검정 서체인 듯보여도 그 검정의 색깔들이 저마다 고유의 번호(이름)를 가졌음을 알게 된다. 인쇄소에 인쇄물을 맡길 때 표지의 제목을 가공처리하기 위해 디자인 파일 안에 K100이란 컬러를 지정하는데 순수한 검정 기본색이지만 혹시라도 그 외의 색을 지정하면 인식이 되지 않는다. 어떤 책은 디자인이 세련되어 보기거나 그 반대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가 이처럼 색 코드를 적절히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검정 안에서도 채도와 명도에 따라 검정의 영역이 찍힌 좌표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듯, 우리의 생각의 컬러 역시 비슷해보여도 저마다 겹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블랙의 세상도 이렇게 다를진대, 자기 안의 블랙이 정확히 어떤 코드인지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글을 쓴다는 건 자기 안의 블랙이 정확히 어떤 코드인지를 더 가까이 들여다보기 위해 스스로를 가두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의식에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내가 찾는 블랙은 더 많은 컬러 코드를 본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자기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기 어려우므로, 내가 찾는 블랙을 알기 위해서는 범위를 더 좁혀야 한다. 답은 그 안에 있다.
내가 나를 알기 위해서 바깥 세상과의 문을 닫고, 내면의 세계로 깊이 들어간다는 것. 그것은 외부의 왜곡된 현실이 아닌 내가 가진 ‘실재 세상’을 탐구하기 위한 여정과도 같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겠다고 결심한 이들이 이 순간에도 글쓰기라는 아득한 우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채비한다. 세상에 나를 찾아나가는 방법은 많겠지만, 내 안의 목소리를 따라 구심력의 삶을 사는 이들이 글을 쓰는 삶을 산다. 그 중에서도 자기를 알아내는 수단으로써 오직 글쓰기 외에 다른 수단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사람은 나처럼 작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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