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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과제

  • 작성자 사진: 리퍼블릭 편집부
    리퍼블릭 편집부
  • 7월 7일
  • 3분 분량

나는 지금 어떤 방향성에 관해 쓰려고 한다. ‘전인미답’이라는 말처럼 인생은 각자의 유일한 답을 찾는 게임일 테지만, 그것은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끝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삶은 왜 멀리서 보면 희극인 걸까. 마치 정해진 게임처럼 나이가 든 사람들은 똑같은 말을 하는데, 그건 삶의 방향성에 있어서 정해진 경로가 있다는 뜻처럼 들린다. 노구를 이끌고 새벽부터 나와서 육수를 끓였을, 개봉역 입구에서 국수집을 하는 주인 할머니의 평생에 걸쳐 이어왔을 노동은 일상이 그저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루틴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걸 게임처럼 즐기면 삶이 희극일 테지만, 시지프스처럼 자신이 노동의 노예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비극인 걸까. 국수를 먹고 카드결제를 망설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 PC방에서 밤을 새워 게임을 하던 남자들이 주문한 라면 그릇을 설거지하던 알바생은 자신이 ‘노예’ 쪽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국수를 먹고 일을 하기 위해 들른 PC방의 화장실 벽에는 휴지를 변기에 넣으면 자신이 괴로워지니 제발 휴지통에 넣어달라며 ‘노예’라고 스스로를 지칭한 알바생의 공지문이 붙어 있었다. 갓 스물도 안 된 여자애가 선포한 노예의 삶은 부조리하기에 나는 그 알바생보다 대략 35배를 더 산 국수집 할머니가 가게에 붙여 놓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의 성경 문구에 어쩔 수 없이 희망을 걸기로 한다. 인생이 비극임을 평생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노파가 게임을 해피엔딩으로 끝내기 위한 마지막 치트키, 그런데 나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인류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십자가 대속의 협박에 도매금으로 넘어간 수천만의 기독교인들을 안타까워했던 터였다.

 

육신으로 태어나 세월에 부대끼며 일상에 자석처럼 붙어 살아온 우리 엄마와 우리네 엄마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돈 걱정 같은 결핍과 병치레에 너덜너덜해진 자기 인생을 한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배운 게 없고 안목도 없지만 인간의 생이 고작 이런 것일 리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일까. 그들에게 생의 고단함을 일사불란하게 설명하고 나아가 영원한 행복의 보너스까지 안겨주는 신의 큰 그림에 자신들이 선택받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가난이나 몸의 고통, 삶의 부조리 같은 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거구나, 근데 예수님은 이런 나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는걸, 내가 하는 고생은 고생도 아니지...실은 매일 위로받아도 모자랄 판에 매일 스스로를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는 목사님의 설교에 껍죽 넘어가서 아침 운동을 하러 뒷산에 오를 때도 설교 말씀을 스피커로 틀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엄마들에게 그건 비루한 삶의 알리바이 같은 것이었다. 구원과 천국까지는 잘 판단이 안되더라도, 예수님은 안 믿는 것보다는 그래도 믿는 게 낫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논리,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의지할 곳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건 일종의 보험에 드는 심정일까.

 

그런 엄마들을 비웃은 건 아픔과 가난이 뭔지 모르는 자식 세대들이었고,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삶의 고단함과 고통을 슬쩍 비껴나 살아온 이들이었다. 무엇이든 매달려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절실한 상태가 되어야만, 신을 믿고 매주 교회에 나가서 울면서 기도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병을 액세서리처럼 달고 살거나 먹고 사는 걱정이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을 때,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고 생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나를 믿거나 신을 믿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엄마들은 결국 이렇게 고생스러운 삶이라도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낫고, 결국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라는 목사님의 설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날이 죄와 마귀와 싸우면서 예수님한테 매달리는 것이, 모진 생의 모순을 복잡하게 따지고 드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간단하다.


‘고백하자면 이렇듯 강제적이고 다소 폭압적인 통제의 기독교 세계를 줄기차게 비판해온 게 사실이다. 그렇듯 평생 투쟁의 끝에 지옥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에덴동산 같은 천국은 더더욱 없으리라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된 건 불과 며칠 전이다. 삼지창을 들고 꼬리가 긴 악마를 만나진 않겠지만, 생의 쳇바퀴를 지옥불로 사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고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분리의 꿈을 깨어나는 상태는 분명 천국일 것이다.

저 지긋지긋한 성경 속의 죄의 논리는 나와 타인의 실수를 넘겨보거나 실재화하지 말아야 할 용서라는 구원의 원리에 다른 판본일 뿐이다. 표현 방식이 투박하거나 일부 실수가 있을 수는 있지만 결국 자기 구원이라는 방향성에서 나와 우리 엄마들은 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죽으면 천국 또는 지옥에 간다는 논리를 유치하다고 비웃기 전에 삶이 실제 동화에 나오는 놀라운 은유로 가득 차 있는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스스로 깨어나 목적지를 정하고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시간과 사건을 사용하는 성령의 논리가 기독교에 적용되지 말라는 법도 없는데, 나는 왜 여태 기독교를 계속 ’실재화‘하기만 했던 걸까. 결국 지하철에서 누더기 옷을 입고 전도하는 사람이나, 목사님을 신처럼 받들어 모시는 교인들이나, 모두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거라면, 그래야만 이 게임의 감독판이 드디어 끝나는 것이고 이 여정은 시간 차가 존재할 뿐 이미 완수된 과업일 뿐이라면, 대체 내가 용서하지 못할 게 뭐가 있을까.


그들이나 나나 좋든 싫든 판단을 멈출 때까지 시간을 살아가야 하고, 이런 글을 쓰고 있다면 여전히 용서의 과제를 실천하고 있을 뿐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만이 남는다. 갈등은 내 안에나 있는 것이겠지. 내 안에 천국이 있고 모두가 하나라면 이 세상이 지금 당장 사라지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국수집 사장님과 PC방 알바생과 수천만의 기독교인과 우리 엄마를 이해하고, 나아가 공감할 수는 없을지라도 분명한 건 나에게는 여전히 수많은 용서의 과제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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