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아날로그
- 리퍼블릭 편집부

- 6월 25일
- 3분 분량

우리가 아기를 사랑하는 이유는 존재 상태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기들의 무구한 얼굴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주변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감정을 공유하려고 한다. 사람이 죽을 때 어린 아이로 돌아간다고 하는 걸 보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사랑임을 암시하는 것일지 모른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호기심과 애정으로 바라볼 수 없는 어른이 현재 우리의 상태다. 디지털이 모든 걸 잠식해나가는 시대, AI에 의해 분석되지 않는 것이 없는 과 최적화의 편리함 속에서 사랑의 길은 아득하다. 순전히 경제 논리로만 따져보면 결혼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모험임에 틀림없다. 따질 걸 다 따져 내 사랑의 기준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 믿지만 글쎄, 사랑의 시작은 순전히 감정의 문제일 텐데 머리로 모든 걸 다 계산할 수 있다고 감정까지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건 이성적 판단의 오만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랑은, 또 결혼은 교통사고처럼 느닷없이 닥쳐오는 거라는 말이 진실에 가까운 건 그 때문이다. 머리로 알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는 알 수 없는 것 때문에 휩쓸린다. 생각해보면 계산될 수 없이 사랑하는 것들의 목록은 꽤 길다. 이성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옷에 미치거나 시계에 홀린 듯 살아가거나 직업을 바꾼 사람들은 많고, 음악을 평생 끼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취미보다는 광기에 가까운 행위들은 돈 한 푼 가져다주지 않지만, 거기에 그토록 몰두하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스스로를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노동 혹은 광기
여기엔 직업과 일을 둘러싼 일말의 진실도 포함되어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반평생 이상을 일에 매여서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그것은 노동 혹은 광기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여론은 일을 시시포스의 운명과도 같은 노동의 굴레로 보길 좋아하지만, 일에 미친 사람은 돈이 되든 안 되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평생 그 굴레를 평생 쓰는 삶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경쟁에서 한참 앞서 있다. 혹자는 취미가 직업이 되면 그 또한 노동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하수의 변명일 뿐이다. 취미가 직업이 되어서가 아니라, 직업을 취미처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업을 취미처럼 하려면 일을 노동이라고 생각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일을 사랑해야 한다.
일을 일로써 대하면 역설적으로 일을 사랑할 수 없다. 일이란, 그 속성상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기 때문인데 어떤 형태의 노동이든 노동은 인간에게 빨리 끝내고 탈출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일을 노동이 아니라 광기의 대상으로 사랑하려면 즐기면서 해야 하고, 일을 즐기려면 반드시 일과 일정 거리를 두어야 한다. 요컨대 일이 노동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즐김’과 ‘여유’라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끝내야 할 일을 알면서도 일부러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이를 즐기는 건 딱 봐도 쉽지 않은 문제다. 그래서 가급적 자기 일을 길게, 오래 하려는 사람일수록 업무량 자체를 줄이게 되는 것이다. 오늘 10을 할 수 있어도 7정도만 하면서 3만큼의 일을 내일로 미루는 건,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 일을 최대한 즐기면서 하기 위한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함이다.
사실 우리가 처음부터 일을 고된 노동으로 바라봤던 건 아니다. 스무 살이 조금 넘어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일을 시작할 때는 누구나 그 일에 몰입한다. 어떻게 하면 더 잘 할지 고민하고, 그 일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의지가 강한 시기는 그러나 오래가지 않는데 그 일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붓고 에너지를 소진한 다음에는 부지불식간 진 빚처럼 기나긴 노동의 시간들이 남겨진다.
디지털에서 로그아웃
일을, 사람들을, 세상을 사랑하려면 아무래도 아이의 본성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대한 애정의 온도가 따듯했던 그 시기의 기억을 잊은 채라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어줍잖게 머리만 굴리다가 살 수도 있다. 인생의 권태가 찾아오는 어느 시기엔 한 번쯤 예전 몰입의 순간을 다시 경험하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기억을 삭제하지 않는 한, 이미 굳은 살을 깎아내듯 퇴화되는 시간을 겨우 뒤로 미룰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을 연습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날로그를 기억해야 한다. 치직거리며 끊기기도 하고 음향이 깨끗하지도 않은 낡은 LP판과 같은 상태를 살려내야 한다. 깨끗한 디지털, 모든 걸 말끔하게 설명하고 남김없이 분석해 내어 스스로가 가장 똑똑한 것 같은 착각을 불어 일으키는 디지털을 로그아웃해야 한다. 거기서는 AI 외에 모두가 머저리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실수를 해야 한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비합리적 선택이 불가피하다. 단지 좋아하는 걸 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두는 어리석음을 용서하는 순간을 맞닥뜨려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내 모든 광기어린 선택을 용서하며 무구한 자아의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려면 전능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세상에서 유일한 한 사람으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실수투성이의 타인들을 용서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나 또한 신과 합일되어야 한다. 구분된 삶, 단독자의 삶으로 위태롭게 균형 잡힌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착각을 부수고 전능자가 내민 손을 잡아야 한다.
이것은 종교의 길이 아니다. 다만 아날로그식으로 조용히 찾아오는 신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아기를 바라보며 느껴지는 감동처럼, 모든 것이 용서되는 순간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수십 번, 수천 번의 선택을 해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산되지 않는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면, 그 사랑의 출처가 신에게서만 나올 수 있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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