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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대필 눈치 게임의 결정판?

  • 작성자 사진: 리퍼블릭 편집부
    리퍼블릭 편집부
  • 8월 7일
  • 2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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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집권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 중 살아남은 이들의

공통점은 '독일어'를

잘 알아들었다는 점이다.

독일어를 '안다'가 아니다.

'잘 알아들었다'는 점이 핵심이다.

그들은 나치 정권의 요구사항이

무언지 파악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수행했기에

죽음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대필작가는 '의중'을 파악하는 직업

잘 알아들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상대의 '의중'을

비교적 정확히 피악했다는 뜻일 테다.

우리 속담에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 듣는다'는 게

바로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사람을 두고 비유한 말이다.

요즘은 생성형AI가 장르불문,

 글을 대신 써주는 시대이다.

최근의 한 연구 보고결과에 의하면,

AI로 인해 대체될 직업군 중

선두 그룹에 작가와 번역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시켜서

이해하는 걸 좋아한다.

특히 AI 관련 논의처럼 비교적 새로운

지식을 두고 논의해야 할 때는

 더더욱 그런 경향이 짙다.

당장 내가 쓴 메모를 생성형

AI 프롬프트에 넣어보고 글을

써달라고 요청한다고 치자.

그럼 그럴 싸한 글이

한 편 뚝딱 나오게 된다.

유레카!

이제 모든 글쓰기 작업이 끝난 걸까?

그럴 리가 없다.

주제와 맥락을

연결지어 '의미'를

도출해내는 작업이 빠졌기 때문이다.

AI가 쓰는 글은 풍부한

지식이 넘친다.

하지만 그안에는

지혜와 미추를 분간해내는

윤리의식이 빠져있다.

그리고 독자로 인간은,

윤리의식에 질문을 던지지 않은

글에는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AI가 쓴 글이 말 그대로 '기계적으로'

쓴 글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AI가 모순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더욱이 자서전이나

출판 원고들은 이 '의미'를 통해

지혜를 길러내기 위한 글이 아닌가!

단순히 책 한 권 분량의 양을

채우기 위함이라면 모르겠지만,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나 기록물을 압축해서

정리하기 위함이라면 모르겠지만,

삶의 의미를 분간해내는

자서전대필 작업에

AI를 쓰는 사람은 평소에 전혀

글을 읽지 않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평소에 글을 잃지 않는 사람은

기계가 쓴 글을 읽고도

사람이 쓴 것 같다며 흡족해한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 기계가

쓴 자기 자서전을 끝까지 읽지 않는다.

제목이 자극적이고 내용이 그럴 듯해보이면

그만이라며..

의중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사람의 생각 깊은 데서

 나오는 한 줄기 빛과 같다.

그 빛을 어떻게

밖으로 나오게 만들까?

닫힌 생각의 문을 여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럼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서

자서전 원고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와 같이

스스로에게 묻는 것은

 즉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다.

무엇이든 수초 만에 답을 내는

생성형 AI에 비해 현저히 생산성이 떨어진다.

그러니 차라리 내가 누군지도

AI에게 묻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앞으로 챗지피티와 같은 생성형

AI가 발달하게 되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사람은

 더더욱 줄어들 것이다.

아무도 AI의 도움 없이는

글 한 줄 쓰지 못하는 '신문맹'의 시대가

도래할 지도 모른다.

'이 글은 AI가 쓴 것인지,

사람이 쓴 것인지'

판독하는 것이

중요해지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AI의 도움 없이

자서전대필 책 한 권의

원고를 써내는 대필작가의

 존재가 귀해질 것이다.

사람 냄새가 나는 글은 희귀하므로,

오늘날 LP판을 소장하려는 이들처럼,

미래에도 인간이 쓴 모순 투성이의

아날로그식 문장이 더 가치 있게

 대접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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