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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적 CEO들은 책을 직접 쓰지 않는가(부제: '대필'을 넘어선 '북 디렉팅'의 시대)

  • 작성자 사진: 리퍼블릭 편집부
    리퍼블릭 편집부
  • 9시간 전
  • 4분 분량

셰릴 샌드버그의 『린 인(Lean In)』은 2013년 출간 직후 전 세계 여성 리더십 담론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이 책을 실제로 '쓴' 사람은 샌드버그가 아니다. TV 작가이자 잡지 기고가인 넬 스코벨(Nell Scovell)이 공동 집필자로 참여해 샌드버그의 경험과 메시지를 서사로 직조했다. 잭 웰치의 『끝없는 도전과 용기(Jack: Straight from the Gut)』는 존 번(John Byrne)이, 리처드 브랜슨의 『버진 웨이(Losing My Virginity)』는 에드워드 휘틀리(Edward Whitley)가 함께 썼다. 샘 월턴, 빌 게이츠, 앤디 그로브까지—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에 걸쳐 경영서 시장을 지배한 CEO 저서 상당수의 이면에는 전문 작가의 손길이 있었다.

 출판 업계에서 통용되는 추산에 따르면, 유명인 저서의 80% 이상이 고스트라이터 또는 공동 집필자의 참여 아래 만들어진다. 2025년 뉴욕에서 열린 고스트라이터 업계 최대 행사 'Gathering of the Ghosts'에는 200여 명의 고스트라이터, 에이전트, 출판사 관계자가 모여 업계의 현재와 미래를 논의했다. 고스트라이팅은 이제 음지의 관행이 아니라, 하나의 전문 산업으로 공론화되고 있는 것이다.

연 수조 원 규모로 성장하는 고스트라이팅 시장

글로벌 고스트라이팅 서비스 시장은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 시장조사 기관에 따라 추정치에 편차가 있지만, 2024년 기준 약 13억~45억 달러(한화 약 1조 8,000억~6조 3,000억 원) 규모로 평가되며, 2030~2031년까지 연평균 6~8%대 성장이 전망된다. 이 시장의 성장을 이끄는 동력은 복합적이다. 셀프 퍼블리싱 플랫폼(아마존 KDP 등)의 확산으로 출판 진입장벽이 낮아진 것, 기업과 개인의 콘텐츠 마케팅 수요가 폭증한 것, 그리고 퍼스널 브랜딩이 경영자의 핵심 전략 자산으로 부상한 것이 주요 요인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가격대의 양극화다. 미국 고스트라이터 협회(Association of Ghostwriters)의 2025년 업계 보고서에 따르면, 단행본 고스트라이팅 비용의 중앙값은 5만 달러(약 7,000만 원) 이상으로 상승 추세에 있다. 10만 달러(약 1억 4,000만 원) 이상을 받는 '식스 피규어 고스트라이터'도 점점 늘고 있으며, 셀러브리티 전문 작가는 그 몇 배를 청구하기도 한다. 반면 AI 활용을 전제로 한 저가 시장도 동시에 형성되면서, 업계 전체가 '프리미엄 인간 집필'과 'AI 보조 집필'이라는 두 축으로 분화하는 양상이다.

'대필'이 아니라 '북 디렉팅'인 이유

한국어로 '대필(代筆)'이라는 단어에는 "대신 써준다"는 수동적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다. 영미권에서도 'ghostwriting'이라는 용어가 단순 문장 대행의 인상을 주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전문 작가가 수행하는 역할은 이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전략적이다.

고스트라이터가 하는 일의 핵심은 저자의 경험에서 '서사적 가치'를 추출하는 것이다. CEO의 머릿속에는 수십 년간 축적된 의사결정의 기억, 실패의 교훈, 시장에 대한 직관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책'이 되지는 않는다. 파편화된 경험을 관통하는 주제를 발견하고, 독자가 몰입할 수 있는 구조로 재배열하며, 저자 고유의 어조와 관점을 살려내는 작업—이것이 '북 디렉팅'의 본질이다.

말라라 유사프자이의 『나는 말라라(I Am Malala)』가 좋은 예다. 이 책은 영국의 저널리스트 크리스티나 램(Christina Lamb)이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램은 분쟁 지역 취재에 풍부한 경험을 가진 기자였기에, 10대 소녀의 증언을 전 세계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글로벌 서사로 전환할 수 있었다. 만약 말라라가 혼자 영어로 썼다면, 이 책이 영국 올해의 논픽션으로 선정되고 세계적 화제작이 되었을까? 전문 작가의 개입은 저자의 메시지를 '희석'하는 것이 아니라 '증폭'한다. 이것이 단순 '대필'과 '북 디렉팅'의 결정적 차이라고 할 수 있다.

AI가 넘지 못하는 벽: 왜 '사람'이 써야 하는가

2022년 ChatGPT 등장 이후, "AI로 책 한 권 뚝딱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출판계에도 퍼졌다. 그러나 3년이 지난 2025년, 업계의 평가는 냉정하다.

고스트라이터 협회 보고서는 AI 생성 글이 "밋밋하고 감정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출판사·에이전트·편집자·독자 모두가 AI 작성물에 저항감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다수의 출판사가 AI 생성 원고의 접수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2025년 공동 수행한 조사에서는 작가의 61%가 AI를 '어느 정도' 활용하고 있지만, 그 용도는 주로 리서치·제목 구상·브레인스토밍에 한정되며, AI로 콘텐츠 자체를 생성한다고 답한 비율은 7%에 불과했다.

전문 고스트라이터의 역할은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영역에 집중되어 있다. 인터뷰 과정에서 저자가 무심코 흘린 한마디, 즉흥적으로 나온 일화, 본인도 의식하지 못했던 의사결정의 패턴을 포착하는 것은 인간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저작권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AI가 생성한 콘텐츠는 현행법상 저작권 보호를 받기 어렵다. 이는 자서전이나 경영서처럼 저자의 고유한 관점이 핵심 자산인 책에서는 치명적 약점이 된다. 내 이름을 걸고 출간한 책이 법적 보호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면, 그 책의 전략적 가치는 근본부터 훼손되기 때문이다.

한국 시장에서 '북 디렉팅'이 필요한 맥락

한국 출판계에서 고스트라이팅은 영미권 못지않게 보편적인 관행이다. 정치인·기업인·공직자의 자서전과 회고록 대부분은 전문 작가의 취재와 집필을 거쳐 만들어진다. 인터뷰 기반으로 저자의 구술을 전문 작가가 정리하고, 저자가 최종 확인하는 프로세스가 표준화되어 있는 셈이다.

다만 한국 시장에는 몇 가지 고유한 맥락이 있다. 첫째, '한 권의 책'이 갖는 사회적 무게가 여전히 크다. 디지털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에도, 한국에서 단행본 출간은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공인받는 일종의 '인증'으로 기능한다. 은퇴를 앞둔 공직자, 창업 스토리를 정리하고 싶은 CEO, 전문 영역에서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의료인이나 법조인 등 잠재 수요층이 넓다.

둘째, K-콘텐츠 시대를 맞아 한국 출판물의 해외 수출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이다. 에이전시를 통한 해외 판권 계약이 활발해지면서, 출판물의 완성도에 대한 기준도 높아지고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단순한 문장 교정이 아니라, 기획 단계부터 개입하는 '북 디렉팅'이다.

좋은 책은 '글솜씨'가 아니라 '기획력'에서 나온다

책을 쓴다는 것은 글을 잘 쓰는 것과 같지 않다. 경영서·자서전·전문서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문장의 화려함이 아니라 설계의 정밀함이다.

PR 컨설팅 기업 APCO 월드와이드의 조사에 따르면, 성인 77%가 CEO의 평판이 해당 기업에 대한 투자 의향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한 권의 책은 단순한 자기 기록이 아니라, 저자의 전문성과 비전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고도의 브랜딩 전략이 된다.

좋은 기획은 저자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핵심 가치를 발굴해낸다. 기업 CEO의 이야기가 단순한 창업 성공담에 그치지 않고 '소외된 감각의 회복'이라는 사회적 서사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은, 저자의 경험을 객관적 거리에서 조망할 수 있는 전문 기획자—북 디렉터—가 있기 때문이다.

기록되지 않은 성취는 기억되지 않는다

2024~2025년 출판 업계의 가장 뚜렷한 트렌드는 '스토리텔링의 귀환'이다. 논픽션과 비즈니스서를 막론하고, 강력한 서사를 갖춘 책이 독자의 선택을 받고 있다. 고스트라이터 협회는 "2024~2025년에 가장 잘 팔린 책은 거의 모든 카테고리에서 독자를 사로잡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이 흐름 속에서 경영자의 선택지는 세 가지다. 첫째, 직접 쓴다. 시간과 글쓰기 역량이 충분하다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경영 일선에 있는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선택이다. 둘째, AI에 맡긴다. 빠르고 저렴하지만, 저작권 보호가 되지 않고 출판사의 수용도도 낮다. 셋째, 전문가와 협업한다. 초기 비용이 수반되지만, 저자의 고유한 관점이 보존되고, 시장에서 통용되는 완성도를 담보할 수 있다.

헨리 포드의 『나의 삶과 일(My Life and Work)』은 고스트라이터 새뮤얼 크로우더(Samuel Crowther)가 집필했다. 이 책은 출간 100년이 지난 지금도 경영학 필독서로 읽히고 있다. 윈스턴 처칠은 방대한 집필 팀—비서, 보조 연구원, 역사학자—과 협업해 저작을 생산했으며, 이 성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기록은 기록하는 자의 몫이되, 그 기록을 '읽힐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전문성의 영역이다. 그것이 '북 디렉팅'이 존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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