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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들이 대필작가를 써서라도 비즈니스 회고록을 만드는 이유

  • 작성자 사진: 리퍼블릭 편집부
    리퍼블릭 편집부
  • 4일 전
  • 4분 분량

CEO가 대필작가를 써서라도 비즈니스 회고록을 만드는 이유

2011년 스티브 잡스가 CEO직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한 날, 애플 주가는 하루 만에 약 3% 하락했다. 시가총액으로 환산하면 약 100억 달러, 한화 약 14조 원이 하루아침에 증발한 셈이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하다. 시장은 재무제표뿐 아니라 CEO라는 '인격적 서사'에도 가격을 매긴다는 것이다.

CEO의 브랜드 가치에 관한 학술 연구(Marc Fetscherin, 2015, Journal of Business Strategy)는 이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CEO는 기업의 재무 성과, 주가 수익률, 직원 채용과 유지, 업계 신뢰도, 그리고 기업 전체의 평판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 영향력을 가장 밀도 있게 응축할 수 있는 매체가 바로 한 권의 책이다.

'성공담'을 넘어선 책들이 시장을 움직였다

비즈니스 회고록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시장에서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한 책들이 하나같이 '성공 자랑'이 아닌 '위기의 기록'이었다는 점이다.

필 나이트(Phil Knight)의 『슈독(Shoe Dog)』(2016)은 나이키의 창업 서사를 담고 있지만, 이 책의 서사적 중심은 '승리'가 아니라 '위기'이다. 1962년 아버지에게 50달러를 빌려 일본산 운동화를 자동차 트렁크에서 팔기 시작한 나이트는, 첫해 매출 8,000달러로 출발했다. 이후 수십 년간 만성적 현금 부족, 거래처와의 법적 분쟁, 은행의 대출 거부, 관세 당국의 2,500만 달러 소급 부과(당시 기준 회사를 파산시킬 수 있는 금액) 등을 견뎌야 했다. 빌 게이츠는 이 책에 대해 "사업 성공의 실제 경로가 어떤 것인지 솔직하게 보여주는 드문 책"이라고 평했고, 워런 버핏은 나이트를 "탁월한 이야기꾼"이라 불렀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5위에 오른 이 책은 넷플릭스가 영화 판권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연 매출 300억 달러를 넘긴 기업의 창업자가 들려주는 '거의 망할 뻔한 이야기'가, 성공 스토리보다 훨씬 강력한 브랜드 자산이 된 것이다.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의 『온워드(Onward)』(2011) 역시 같은 구조를 따른다. 2008년 금융위기 한가운데서 8년 만에 스타벅스 CEO로 복귀한 슐츠는, 수백 개 매장 폐쇄, 4억 달러 규모의 비용 절감, 경영진 전면 교체라는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린다. 이 책이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것은 '우리는 이렇게 성공했다'가 아니라 '우리는 이렇게 견뎠다'를 정면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워런 베니스(경영학자)가 이 책을 "우리 시대 리더십과 변화에 관한 가장 중요한 단행본"이라 평한 것은, 위기의 기록이 갖는 서사적 무게를 정확히 짚은 것이다.

비즈니스 회고록은 세 가지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들 사례를 종합하면, 잘 기획된 비즈니스 회고록이 창출하는 가치는 세 가지 차원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첫째, 내부를 향한 '철학적 롤모델'로 기능한다. 뉴코어 스틸(Nucor Steel)의 CEO 켄 아이버슨(Ken Iverson)이 1997년 펴낸 『Plain Talk』은 미국 최고 생산성의 철강회사를 만든 비결을 담고 있다. 그 핵심은 기술 혁신이 아니라 "경영진과 직원의 이해관계가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관념을 밀어젖히는 것"이었다. 이 한 줄의 문장이 활자화됨으로써 뉴코어의 경영 철학은 특정 CEO의 재임 기간을 넘어 조직의 영구적 자산이 되었다. 기업 문화에 대한 WifiTalents의 조사에 따르면 직원의 56%가 기업의 문화와 가치관이 직무 만족도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으며, 직원 행복도가 높은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 대비 약 23%의 매출 프리미엄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CEO의 철학이 명시적으로 문서화된 책은 사내 교육 프로그램이나 구두 전달보다 강력한 도구가 된다.

둘째, 외부를 향한 '신뢰'로 작동한다. PR 컨설팅 기업 APCO 월드와이드의 조사에서 성인 77%가 CEO의 평판이 해당 기업에 대한 투자 의향에 영향을 준다고 답했다. MIT 슬론 경영대학원 리뷰에 게재된 한 B2B 고객 연구는 더 직접적이다. 고객이 어떤 기업의 가치관이 경쟁사보다 덜 정렬되어 있다고 인지하면 매출이 최대 30%까지 감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CEO의 회고록은 기업의 가치관을 시장에 공시하는 가장 밀도 높은 매체가 된다. 분기별 실적 발표나 ESG 보고서가 전달하지 못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의 차원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리더 개인의 경력에 대한 '자산'이 된다. Harris Poll의 조사에서 CEO의 사상적 리더십(Thought Leadership) 투자는 14배의 ROI를 산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잭 웰치가 GE CEO 시절 회고록 『끝없는 도전과 용기(Jack: Straight from the Gut)』에 710만 달러(당시 기준 경영학 대가 피터 드러커 최고 선인세의 약 20배)의 선인세를 받은 것은, 출판사가 'CEO의 이름값'이 갖는 시장 가치를 정확히 계산한 결과다.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결정했는가'

리퍼블릭미디어는 CEO 회고록을 분석하면서 흥미로운 관찰을 남겼다. 글을 잘 쓰는 능력과 기업을 잘 경영하는 능력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HP, GM, IBM 등의 CEO들이 집필에 나설 때마다 독자들은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바로 전문 작가와의 협업이다.

중요한 것은 회고록의 초점이 '성과'가 아니라 '의사결정 과정'에 놓여야 한다는 점이다. 콘티넨탈 항공의 고든 베쑨(Gordon Bethune)은 "CEO가 천재적 전략을 혼자 고안해 회사를 구한다"는 신화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리더십의 본질은 구성원의 사고를 재구성하고,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만들고, 그 성과에 보상하는 '실행'에 있다고 기록했다.

이 관점은 한국의 비즈니스 회고록 시장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기업인의 자서전이나 회고록 중 상당수가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만큼 성장했다"는 서사 구조에 갇혀 있다. 그러나 독자—그리고 시장—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성과 수치가 아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던 그 순간, 왜 그 선택을 했는가. 어떤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 가치관을 기준으로, 어떤 위험을 감수하며 결단을 내렸는가. 이 의사결정을 토대로 집필된 책은 비로소 단순한 자기 기록을 넘어 조직과 시장에 실질적 가치를 생성하는 자산이 된다.

기록은 기획되어야 한다

앨프레드 슬론(Alfred Sloan)의 『나의 GM 시절(My Years with General Motors)』(1963)은 존 맥도널드와 캐서린 스티븐스의 도움으로 집필되었다. 이 책은 이후 경영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슬론 혼자서는 만들 수 없었던 가치다. 경영자에게는 현장의 지혜가 있고, 전문 작가에게는 그 지혜를 세대를 넘어 전달될 서사로 구축하는 기술이 있다. 이 둘이 만날 때 비즈니스 회고록은 개인의 추억이 아닌 산업의 레퍼런스가 된다.

2024~2025년 글로벌 출판 업계의 가장 뚜렷한 추세는 모든 카테고리에서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갖춘 책이 선택받고 있다는 것이다. 비즈니스서라고 예외가 아니다. '하우투(How-to)' 형식마저도 내러티브 구조를 요구받는 시대다. 이 흐름에서 기업인이 고려할 것은 '책을 쓸까 말까'가 아니라 '어떤 기획으로, 누구와 함께 만들 것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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