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제작, ‘가성비’ 찾다가 ‘가보’를 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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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제작, ‘가성비’ 찾다가 ‘가보’를 잃습니다

  • 작성자 사진: 리퍼블릭 편집부
    리퍼블릭 편집부
  • 9월 16일
  • 3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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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자서전'의 함정, 출판사 작가가 본 안타까운 현장 이야기

요즘 서점에 가면 그런 책들이 있습니다. 분명 한 사람의 인생을 담은 책인데, 이상하게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책. 멋진 표지와 그럴듯한 제목을 가졌지만, 몇 장 넘기다 보면 마치 미리 만들어진 틀에 사연만 살짝 부어 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책들 말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비용을 아끼기 위해 ‘챗지피티’나 ‘템플릿 서비스’를 이용해 뚝딱 만들어 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진 넣고 질문에 답만 하면 책이 나온다는데, 얼마나 편해?" "요즘 세상에 굳이 사람 써가며 만들 필요 있나? 저렴하고 빠르면 됐지."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생각입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출판사 편집자로서, 또 한 사람의 인생을 글로 옮기는 작가로서, 이런 ‘가성비’ 자서전들을 볼 때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되었다'는 옛말을 떠올립니다. 작은 비용을 아끼려다,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소중한 기록을 영영 값싼 인쇄물로 전락시켜 버리는 ‘소탐대실’의 현장을 너무나도 많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모범 답안’에 갇혀버린 내 인생

얼마 전, 평생을 교직에 헌신하다 정년 퇴임하신 한 교장 선생님께서 붉어진 얼굴로 저희 출판사를 찾아오셨습니다. 손에는 자녀들이 선물해 드린 ‘ai로 만든’ 자서전이 들려 있었습니다. “내 평생의 교직 생활이 어찌 이리 단편적일 수가 있단 말인가…”라며 한탄하시는 그 책을 넘겨보았을 때, 저는 그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었습니다.

책은 앱이 제시하는 질문들에 따라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은?’, ‘첫 부임지의 추억은?’,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너무나도 정형화된 질문들. 교장 선생님의 답변은 그 질문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진 동료 교사를 깨우기 위해 밤새 씨름했던 그의 ‘교육 철학’, 가난한 제자의 손을 붙잡고 함께 울었던 ‘진짜 교육자의 마음’, 수십 년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완성한 그만의 ‘교육 비망록’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앱의 알고리즘은 교장 선생님의 인생에 숨겨진 ‘맥락’을 짚어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족집게 과외 강사가 뽑아준 기출문제만 풀고서, 자기 인생에 대한 심층 서술형 시험을 치르려는 것과 같습니다. 정답 비슷한 것은 맞출 수 있겠지만, 정작 ‘나’라는 사람의 고유한 생각과 철학,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무늬는 담아낼 수 없는 것이지요.


비용을 아낀 것이 아니라, ‘과정’을 잃은 것입니다

진정한 자서전 만들기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나열하는 ‘기록’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인생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 바로 ‘나’ 자신과 깊이 있게 만나는 ‘성찰’의 여정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전문 작가는 그 여정의 동반자이자,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능숙한 ‘가이드’입니다.


  • “그때 왜 그런 결정을 하셨습니까?” 라는 집요한 질문을 통해, 나조차 잊고 있던 내 삶의 ‘결정적 순간’들을 수면 위로 건져 올립니다.

  • 두서없이 쏟아내는 이야기의 파편들 속에서, 내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와 ‘의미’를 엮어냅니다.

  • 객관적인 자료와 주변인의 인터뷰를 통해, 나만의 회고가 아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시대의 이야기’로 확장시킵니다.


자서전 앱은 이 소중한 ‘과정’을 통째로 생략해 버립니다. 주어진 질문에 답을 입력하는 동안, 우리는 깊이 생각할 틈 없이 ‘모범 답안’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결국 완성된 책은, 내 인생의 복제품이 아니라 ‘그 앱이 해석한 내 인생의 요약본’일 뿐입니다. 이는 마치 평생 살 집을 짓는데, 설계도도 없이 조립식 자재만 배달받아 대충 끼워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내 인생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자서전은 닳아 없어질 물건이 아닙니다. 내가 떠난 후에도 남아 자식과 손주들에게 ‘나’라는 사람을 이야기해 줄 유일한 유산이며, 가문의 역사를 써 내려갈 첫 번째 페이지입니다. 그런 소중한 ‘가보(家寶)’를 만드는 일에 ‘가성비’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몇 푼의 비용을 아끼고자 선택한 편리함이, 훗날 내 아이들이 “우리 할아버지는 이런 분이셨구나!”라며 무릎을 칠 기회를, 내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후대에 전할 기회를 영영 앗아갈 수도 있습니다.

부디, 당신의 인생을 ‘템플릿’에 가두지 마십시오. 당신의 삶은 세상의 그 어떤 알고리즘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명작입니다. 그 명작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고 최고의 작품으로 빚어낼 전문가와 함께, 인생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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