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경영보고서 ‘사례집’처럼 만들어야 하는 이유
- 리퍼블릭 편집부

- 4일 전
- 2분 분량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편집하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문서는 도대체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걸까?”
기업은 ‘우리는 환경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우선합니다’라고 적어놓지만, 막상 그 문장은 사람의 말투가 아니다. 마치 규정집처럼 말하고 메뉴얼처럼 기록한다. 그러니 독자가 마음을 줄 틈이 없다.
그러던 어느 해, 한 식품회사의 보고서를 맡게 됐다. 처음 받은 원고는 활동명과 달성률만 연달아 나열돼 있었다. “지역사회 봉사 14건”, “폐기물 재활용률 36% 향상”. 숫자로는 그럴듯했지만, 사람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대표는 보고서를 넘기며 말했다.
“우리는 여러 일을 잘 해왔는데, 왜 우리는 늘 ‘딱딱한 회사’로만 보일까요?”
나는 그 질문에서 대표님의 고민을 읽었다.
그래서 보고서를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단순히 문장만 매만지는 게 아니라, “이 일은 도대체 누가, 어떤 순간에, 왜 시작했는가”를 다시 살펴보는 과정이었다.
숫자 대신 ‘장면’을 보여줘야 한다.
이 회사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뜻밖에도 아주 소소한 데에 있었다.
지역 농가와 상생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챕터에서, 담당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농가에서 ‘사과가 물에 잠겼다’는 연락이 왔는데, 본사 직원들이 퇴근도 안 하고 다 같이 뛰어나갔죠. 장화도 없는 사람들은 비닐봉지를 발에 감고 들어갔어요.”
프로그램 설명 페이지 한쪽에 ‘그날의 장면’을 넣었다.
결과적으로 이 기업의 보고서는 “지역을 위해 이렇게 기여했습니다”라는 성과 홍보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이야기를 담게 되었다. 숫자가 아니라 사례 하나가 기업의 철학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디자인은 메시지의 ‘방향’을 잡아준다
보고서를 사례집처럼 만든다는 건 사진을 얹어서 디자인을 하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기업의 메시지를 읽을 만한 흐름으로 다듬어내는 일이다.
예전에 한 에너지 기업의 보고서를 디자인했던 적이 있다. 활동들은 꽤 훌륭했지만, 보고서 전체가 회색 도표로 가득해 어떤 장면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구조를 완전히 바꿨다.
각 사례마다 작은 제목을 붙였다.
예를 들어, 지역 난방 개선 프로젝트는 ‘겨울이 아프지 않은 동네’라는 제목으로 열어두고, 바로 옆에는 현장 직원의 한 문장을 넣었다.
이후 이 보고서는 사내외에서 “보고 싶게 만드는 지속가능보고서”라는 평가를 받았다.
윤문기획의 역할
지속가능경영보고서는
기업이 왜 이 방향으로 가고 싶은지, 그 길을 걸으며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남기는 기록이다.
그래서 윤문기획은 단순히 글맛을 고치는 작업으로 끝나지 않는다.
편집자는 발주기관 실무자에게 끝없이 묻는다.
“왜 시작하셨나요?”
“어떤 순간이 가장 어려웠나요?”
“그때 누가 있었나요?”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기업 스스로도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가치관이 서서히 드러난다.
어떤 기업은 “우리는 사실 변화가 두려웠다”는 고백을,
다른 기업은 “사람이 바뀌면서 회사도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국, 보고서는 기업이 세상과 나누는 한 편의 이야기다
잘 만든 지속가능경영보고서는 성과를 전시하기보다다
기업이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를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아냈는지’ 정리하는 책이다.
사례집처럼 만들라는 말은, 이 기록이 사람에게 닿아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우리는 숫자로 설득하는 시대를 지나,
이야기로 신뢰를 쌓는 시대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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