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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가 자비출판의 환상과 AI의 배신

  • 작성자 사진: 리퍼블릭 편집부
    리퍼블릭 편집부
  • 7시간 전
  • 3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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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30만 원이면 책 한 권 뚝딱 나온다는데요? 챗GPT가 원고도 다 써주고요."

얼마 전, 예비 저자 A씨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그의 스마트폰 화면에는 'AI로 3시간 만에 전자책 완성', '단돈 0원으로 출판하기' 같은 자극적인 광고 문구들이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네, 글뭉치를' 만들 수 있죠. 하지만 그게 과연 '책'일까요?"

최근 자비출판 시장에 '초저가' 바람이 불고 있다. 물론 출판의 문턱이 낮아진 건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비용 절감에만 목숨을 걸고, 검증되지 않은 AI 원고를 그대로 갖다 썼다가 낭패를 본 사례들이 출판계 뒷담화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오늘은 싼 게 비지떡인 줄 알면서도 덜컥 물었다가, '반품 비용'이 더 들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AI가 써준 역사책,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타고 우주로?

은퇴 후 자신의 지식을 나누고 싶었던 B씨는 '한국의 역사'를 주제로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 대필 작가 비용이 부담스러웠던 그는 생성형 AI에게 목차를 주고 집필을 맡겼다. 교정 교열? 비용이 드니 패스. 팩트 체크? AI가 똑똑하니 맞겠거니 하고 패스. 표지 디자인? 무료 이미지 생성 AI로 해결. 그렇게 단돈 50만 원도 안 되는 비용으로 그럴듯한 양장본이 탄생했다.

문제는 책이 서점에 깔린 후 터졌다. "작가님, 150페이지에 이순신 장군이 1900년대에 활약했다고 나오는데요?" 독자의 항의 전화를 받고 확인해 보니, AI가 쓴 문장 속에 시대적 배경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심지어 참고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 논문이었다. AI의 고질적인 문제인 '할루시네이션(거짓 정보를 사실처럼 말하는 현상)'을 그대로 인쇄해 버린 것이다.

결국 B씨는 서점에 배포된 책을 전량 회수하고 폐기해야 했다. '역사 전문가'로 인생 2막을 시작하려던 그의 꿈은 '가짜 뉴스 유포자'라는 오명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아낀 돈 300만 원보다, 잃어버린 신뢰 회복 비용이 수천만 원은 더 들게 생긴 셈이다.

손가락이 6개인 표지 속 주인공

웹소설 작가를 꿈꾸던 C씨는 표지 일러스트 비용 50만 원이 아까워 그림 그려주는 AI를 돌렸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소녀"를 주문하자 꽤 근사한 이미지가 나왔다. 그는 환호하며 그대로 표지로 썼다.

책이 출간되고 독자 리뷰가 달렸다. "내용은 좋은데, 표지 여자 주인공 손가락이 6개네요. 좀 징그러워요." 자세히 보니 소녀의 손가락 관절이 기괴하게 꺾여 있고 개수도 맞지 않았다. 사람 디자이너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를 AI는 태연하게 저지른 것이다. "표지부터 성의가 없는데 내용은 오죽하겠냐"는 악플과 함께 C씨의 소설은 클릭조차 받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사례 3: '복붙'의 향연, 영혼 없는 자기계발서

가장 흔한 케이스는 D씨 같은 경우다. 그는 "성공하는 습관"에 대한 책을 AI로 썼다. 문장은 매끄러웠다. 비문도 없었다. 하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어디서 많이 본 내용의 짜깁기.", "좋은 말 대잔치인데 마음에 남는 게 하나도 없음.", "저자가 누군지 느껴지지 않음."

AI는 평균적인 데이터를 조합하는 데 능숙하다. 즉, AI만으로 쓴 글은 '실패하지 않는 글'일 수는 있어도,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은 되기 힘들다. 저자의 고유한 경험과 편집자의 날카로운 기획이 빠진 글은, 영양가 없이 칼로리만 높은 인스턴트 식품과 같다. 먹을 땐 그럴듯하지만, 먹고 나면 속이 더부룩하다.

싼 가격 뒤에 숨겨진 '진짜 비용'

많은 이들이 자비출판 비용을 계산할 때 '인쇄비'만 생각한다. 하지만 책 한 권이 제대로 서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보이지 않는 손'이 필요하다.

  1. 전문 편집자: AI의 뻔한 문장을 쳐내고, 글의 맛을 살리는 요리사.

  2. 교정/교열: 비문과 오탈자를 잡아내는 깐깐한 감독관.

  3. 북 디자이너: 텍스트 덩어리를 사고 싶은 상품으로 포장하는 아티스트.

이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AI와 무료 툴로만 만든 책은, 마치 재료 손질도 안 하고 끓인 찌개와 같다. 내가 먹을 거라면 상관없지만, 남에게 돈 받고 팔 음식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책은 당신의 명함이다

자비출판은 분명 매력적인 도구다. 하지만 '싸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책은 세상에 내놓는 당신의 또 다른 얼굴이자 명함이다. 저가형 AI 출판으로 100만 원을 아끼려다, 당신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헐값에 넘기지 마라.

AI는 훌륭한 조수일 뿐, 당신의 영혼까지 대필해 줄 수는 없다. 독자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행간에 숨겨진 저자의 땀과 진심을 귀신같이 알아챈다. 부디, 당신의 소중한 이야기가 '싸구려 떨이 상품'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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